나라 지키고 풍요 가져와 한국인의 龍 사랑 옛 풍속을 보다 김종대 동아일보


양반은 당상관에까지 오를 수 있었으나, 기술관과 서얼은 당하관까지, 향리와 토관은 참상관까지, 잡직은 참하관까지만 승진할 수 있었다. 양반의 첩자손도 아버지의 품계, 첩인 어머니의 신분이 양인인가 천민인가 등에 따라 차등을 둔 승진 한계가 엄격하였다. 조선시대의 관료 조직은 문반과 무반의 양반 체제로 이루어졌고 상하 계급이 엄격하였다.


또한 기록물의 내용을 철저히 분석해 전통과 현대를 접목시켜 주는 문화콘텐츠로의 활용 가능성도 계속 타진해 나갈 필요가 있다. 청일전쟁 중에 일본은 조선에 친일 정권을 수립하여 보호국화하려는 적극 간섭 정책을 추진하였다. 일본의 지나치게 고압적인 간섭 정책은 도리어 조선 정부 내에서의 반일친러파를 형성하였다.


이 말을 들은 이순신의 리액션을 연기하는 김윤석은 ‘끝까지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는’ 복잡한 표정을 보여준다. 이 장면의 이순신은 확신을 가진 군인이 아니라, 개인의 감정을 억누르려고 애쓰는 아버지로 보인다. 영화 속 이순신은 포로의 얼굴을 보며 꿈속에서 보았던 왜군의 얼굴을 떠올린다. 영화적으로는 두 사람이 같은 얼굴인 것으로 연출되어 있지만, 꿈이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이 장면에서 영화는 이순신의 선택을 그들이 이면을 죽였다는 확신이 없어서가 아니라, 아들에 대한 복수를 끝내는 것으로 이 전쟁을 끝낼 수는 없기 때문인 것처럼 연출한다.


양반들이 사는 마을을 반촌(班村)이라 하고, 상민들이 모여 사는 마을을 민촌(民村)이라 하였다. 조선 전기의 양반은 대체로 지주이자 지식층으로서 관료층을 이루었다. 설사 벼슬하지 못하였을지라도 학덕을 쌓아 선비로서의 품위를 갖추면 사회 지도층으로 존경을 받았다.


고종은 왕비가 사망한 후 드디어 정치 전면에 모습을 드러내 일본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움직이기 시작하여,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하려다 실패한 뒤 1896년 2월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 이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개혁에 참여한 개화파 인사 다수가 살해되었고, 일부 개혁 조치도 폐기되었다. 그러나 숙종 말년에서 영조 초년 사이에 노론과 소론이 왕위 승계를 놓고 대립하자 환국에 따른 정치적 파장도 급격히 커졌다. 1418년 태종은 적장자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전통을 세우려는 생각을 포기하고, 14년이나 세자 자리에 있던 양녕대군 이제(李禔) 대신 그 동생 충녕대군 이도(李祹)를 세자로 책봉하였다.


충효의 대상인 부모와 군주도 천주의 피조물로서 상대화되었으며, 절대적인 충효에서 상대적인 충효로 변모되었다. 천주교도들은 신분제도에 비판적으로 접근하게 되었는데, 이는 조선 정부와 주자성리학이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규정하게 된 가장 큰 이유였다. 제사는 적장자가 주관하는 것이 원칙이나, 적장자에 후사가 없으면 차자가 받들고, 차자도 무후하면 양첩자(良妾子), 그도 후사가 없으면 입후(立後)라 하여 종족 안에서 양자를 들여 봉사하게 하였다. 그러나 후기에는 서자도 무시하고 적자에게 후사가 없으면 곧바로 양자를 들여 대를 이었다. 가계와 혈통은 매우 중요시되었으므로 봉사와 입후 또한 중히 여겼다.


양반관료제 아래의 학문과 교육은 주로 양반 자제를 대상으로 관료를 양성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때문에 학교는 과거 준비기관이나 다름이 없었고, 따라서 교과 내용도 유학과 한문학이었다. 양반 자제들은 7∼8세가 되면 서당에 들어가 한자와 습자를 배우고, 15∼16세에 이르면 중앙에서는 사학(四學)주213, 지방에서는 향교(鄕校)로 진학하였다. 사학과 향교에서 수년간 수학한 자는 소과주214에 응시하는 것이 상례였다. 성리학이 사회 전반에 확산되면서 안채와 사랑채가 구분되고, 사당이 딸린 집이 권위 있는 양반가, 곧 사대부 가옥의 모습으로 등장하였다.


기술적으로 밭농사는 16세기에 이미 중세의 최고 수준에 도달하여 있었으며, 이후로는 비료 주는 방법과 새로운 작물의 등장 등 부분적 발전에 머물렀다. 논농사가 발달하여 그 비중이 커지는 현상은 14세기 무렵부터 본격화하였다. 바닷가 저지대를 활발히 개간하여 옥토로 인정받기 시작하였고, 농업생산에서 하3도의 비중이 갈수록 높아졌다. 이는 사회 및 정치에도 영향을 미쳐, 지배층이 주로 서울, 경기지역과 하삼도 지역에 분포하게 되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황토고원의 서쪽 란조우 근처에 두께가 200m가 넘는 뢰스 침적지대가 있는데 이곳은 신장지방과 타클라마칸 사막 주변 경계에 해당한다. 그 외 중앙아시아, 남부 이스라엘, 서부 아르헨티나, 미국의 대평원 등지에서도 광범위한 뢰스지대가 분포하고 있다. 뢰스는 신생대 제4기 경(약 180만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 바람에 의한 토양의 이동과 퇴적의 역사는 매우 오랜 것임을 알 수 있다.


토목 공사나 잡역에 동원되는 요역은 법으로 1년에 6일간이었지만, 사실상 수시로 징발되었다. 군역은 상민의 의무 병역으로서 입속하던 병종은 정병(正兵)과 수군(水軍)이었다. 복무 형태는 두 가지로서, 하나는 정군으로 당번 입역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봉족(奉足)으로서 정군의 재정적 뒷바라지를 담당하는 것이었다. 농민은 국가에서 토지를 분급하지는 않았으나, 자기 토지를 소유한 자작농도 있고, 자작 겸 소작농도 있으며, 전호라는 단순 소작농도 있었다. 명종 때에는 모곡이 1할에까지 이르고, 회록법(會錄法)이라는 제도로 발전하였다. 회록법이란 모곡 1두 5홉 중 10분의 9는 지방 관아의 수입이 되고, 나머지 10분의 1인 1승 5홉은 호조의 장부에 올려 국가의 회계에 넣는 제도인데, 뒤에는 3분모(分耗) 회록에까지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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